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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수백만 가지 선택지, 어떻게 관리할까?
새 차를 살 때, 혹은 스마트폰을 고를 때 수많은 옵션 앞에서 고민해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외장 색상, 엔진 종류, 내장재, 오디오 시스템까지 고객의 선택지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객에게는 즐거운 고민일 수 있는 이 다양성이 제조사에게는 엄청난 복잡성을 야기합니다.
실제로 일본의 Toyota는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조합의 수가 1980년 7천 가지에서 1998년 99만 가지로 불과 18년 만에 141배나 폭증했습니다. 이 엄청난 복잡성을 관리하는 것은 제조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 복잡성의 한가운데에 'BOM(Bill of Materials, 자재 명세서)'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BOM을 단순히 '부품 목록'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 BOM은 제품 개발의 흥미로운 전략과 디지털 전환의 비밀을 담고 있는 핵심 요소입니다. 이 글을 통해 BOM에 숨겨진 5가지 놀라운 진실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진실 1: '모든 선택권'은 고객과 기업 모두를 망하게 한다
과거에는 고객에게 가능한 모든 선택권을 주는 '풀 초이스(Full Choice)' 방식이 최상의 서비스라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치명적인 함정이었습니다. 관리해야 할 옵션의 수가 차종 항목 수에 비해 10배에서 100배나 많아지면서, 관리 공수가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했기 때문입니다.
제조업계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등급(Grade) 표현 방식'**에서 찾았습니다. 이는 제조사가 미리 인기 있는 옵션 조합을 '등급'이라는 패키지로 묶어 제공하는 전략입니다. 예를 들어, '차종 + Option 1, 2, 3... + 색상'으로 모든 조합을 열어두는 대신, '차종 + Grade + 색상'이라는 훨씬 단순한 조합으로 사양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 전략은 공급망의 복잡성을 직접적으로 줄이고, 비주류 부품의 재고 비용을 최소화하며, 마케팅 메시지를 단순화하여 더 빠르고 수익성 높은 판매 주기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경쟁 우위 확보 수단입니다.
2. 진실 2: 더 많은 BOM이 더 빠른 시스템을 만든다는 역설
일반적으로 데이터는 한곳에 통합해야 효율적이라는 통념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제품의 모든 정보를 담은 단 하나의 'Core BOM'으로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예를 들어 원가 계산을 할 때, 설계, 생산, 구매 등 모든 정보를 담은 거대한 Core BOM 전체를 참조하면 시스템은 불필요한 데이터까지 처리하느라 속도가 현저히 느려집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역설적이게도 BOM을 분리하고 더 많이 만드는 것입니다. 즉, 특정 업무에 필요한 데이터만 추출하여 **'목적별 BOM'**을 별도로 생성하는 방식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원가계산 BOM'으로, 대표 차종('기준 차종')에 필요한 부품 정보만 추출하여 데이터 볼륨을 가볍게 만듭니다. 원가계산 BOM은 이 강력한 전략의 한 예일 뿐입니다. 글로벌 제조 환경에서는 해외 물류를 위한 ‘KD BOM’, 생산 계획을 위한 ‘Planning BOM’, 심지어 납기가 긴 부품 관리를 위한 ‘Aggregated BOM’까지, 각 목적에 맞는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계된 수많은 특화된 BOM들이 존재합니다.
3. 진실 3: '하나의 완벽한 BOM'이라는 환상을 좇지 마라
하나의 제품을 보더라도 설계팀과 생산팀의 관점은 다릅니다. 설계팀은 부품의 기능적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하며 이는 **'설계 BOM(E-BOM)'**에 표현됩니다. 반면 생산팀은 조립 순서를 중요하게 여기며 이는 **'생산 BOM(M-BOM)'**에 담깁니다.
물론 E-BOM과 M-BOM을 하나의 구조로 통합하는 것이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높은 수준의 모듈화’, ‘공장별 제조 공정의 동일성’, ‘최종 품목 수의 최소화’와 같은 극도로 엄격한 조건들이 모두 충족될 때만 가능합니다. 복잡한 제품을 글로벌하게 생산하는 어떤 기업도 이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설계와 생산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분리된 뷰 모델(Decoupled view models)'**은 단순한 선호가 아닌, 운영 민첩성을 유지하기 위한 실질적인 필수 요건입니다. 핵심은 하나의 완벽한 BOM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부서의 목적에 맞는 '뷰(View)'를 제공하고 이들 간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유연성에 있습니다.
4. 진실 4: 설계 변경 관리는 기술이 아닌, 기업의 생존 기술이다
제품 개발 과정에서 설계 변경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부품 정보를 바꾸는 수준의 작업이 아닙니다. BOM 관점에서는 다음 세 가지 차원의 변경 이력을 모두 독립적으로 추적해야 합니다.
• 차종 정보 변경: 신규 차종이 추가되거나 특정 모델이 단종되는 경우
• 부품 정보 변경: 새로운 부품이 만들어지거나(신설) 기존 부품이 폐지되는 경우
• 부품 구성 정보 변경: 부품 자체는 그대로지만, 부품 간의 조립 관계가 바뀌는 경우
이처럼 복잡한 이력은 **'적용일(Effective Date)'**과 **'설계 변경 번호'**의 조합으로 정밀하게 관리됩니다. 이 과정의 실패가 초래하는 비즈니스 리스크는 막대합니다. 적용일 추적의 단 하나의 오류가 생산 라인 중단, 잘못된 부품 배송, 심지어 수백만 달러의 비용을 유발하는 대규모 리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 프로세스를 넘어, 기업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핵심적인 리스크 관리 활동입니다.
5. 진실 5: 당신이 산 제품은 이미 제품이 아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복잡하고 정교한 BOM 관리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요? 그 답은 제품의 본질적인 변화에 있습니다.
네가 돈을 주고 산 하드웨어일까 아니면 계속해서 진화한 소프트웨어의 구독권일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 아닐까
이 질문은 현대 제품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자동차는 더 이상 한번 팔리면 끝나는 고정된 하드웨어가 아닙니다. 구매 후에도 무선 업데이트(OTA)를 통해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고 성능이 개선되는 **'소프트웨어 중심의 기기(Software-Defined Vehicle, SDV)'**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BOM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납니다. 정교하게 관리된 BOM은 차량의 중앙 컴퓨터에게 어떤 하드웨어 모듈이 설치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알려주어, 어떤 소프트웨어 기능을 활성화하거나 업데이트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디지털 백본(Digital Backbone) 역할을 합니다.
결론: 부품 목록을 넘어 디지털 전략의 심장으로
우리는 BOM에 숨겨진 5가지 진실을 통해, BOM이 단순한 부품 목록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1. **'등급(Grade)'**으로 복잡성을 통제하고,
2. **'목적별 BOM'**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하며,
3. **'여러 개의 뷰(View)'**로 협업의 민첩성을 확보하고,
4. **'정밀한 변경 이력'**으로 비즈니스 리스크를 관리하며,
5. 궁극적으로 '소프트웨어 중심 제품' 시대를 뒷받침합니다.
BOM은 제품의 DNA이자, 복잡성을 지배하고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기업의 핵심 디지털 전략 그 자체입니다. 결국 BOM은 더 이상 관리의 대상이 아닌, 기업이 복잡성을 지배하고 소프트웨어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강력한 전략적 자산입니다.
당신이 다음번에 구매할 제품은 과연 '소유'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끊임없이 진화하는 서비스를 '구독'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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