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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같은 AI를 써도 어떤 회사는 성장하고, 어떤 회사는 멈추는가

CAD&Graphics 2026년 6월호 / 류용효 컨셉맵연구소

2026년의 제조업 현장은 분명 몇 년 전과는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생성형 AI는 일부 혁신 기업이나 IT 조직의 실험 도구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견 제조기업들까지도 ChatGPT, Copilot, AI Agent, Digital Twin, 예측 분석 시스템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회의실에서는 “우리도 AI를 적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들려왔다. 생산기술 부서, 품질 부서, 구매 부서, 설계 부서, 심지어 경영기획 부서까지 AI를 업무에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비슷한 AI 모델을 사용했고, 비슷한 클라우드 환경을 구축했으며, 비슷한 솔루션 공급사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들이 나타났다. 어떤 기업은 AI 도입 이후 생산성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졌으며, 업무 방식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반면 어떤 기업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일럿 프로젝트 수준에서 멈춰 있었다. AI 도입은 했지만 실제 업무 현장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데이터의 양에서 찾았다. “우리는 데이터가 부족해서 그렇다.” “데이터 품질이 좋지 않아서 AI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데이터 표준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였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AI에게 데이터는 연료와도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수년 동안 PLM, MES, ERP, APS 구축 현장을 직접 경험하면서 나는 조금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문제는 데이터의 양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데이터를 연결하는 맥락, 즉 컨텍스트(Context)의 부재였다.

제조기업의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데이터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제품 구조를 관리하는 BOM 데이터가 있었고, 생산 현장의 공정 데이터가 있었다. 설비의 가동 이력과 품질 검사 결과가 축적되어 있었고, 구매 이력과 공급망 정보, 고객 VOC 데이터까지 시스템 곳곳에 저장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충분한 데이터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조직은 의외로 쉽게 침묵했다.

“왜 특정 부품은 항상 일정이 지연되는가?”

“왜 같은 설비를 사용하면서도 공장마다 생산성이 다른가?”

“왜 특정 품질 이슈는 반복적으로 발생하는가?”

“왜 생산 계획은 매번 수정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데이터를 바로 보여주는 조직은 많았다. 그러나 데이터를 기반으로 원인을 설명하는 조직은 많지 않았다. 숫자는 있었지만 흐름은 없었다. 기록은 있었지만 연결은 없었다. 정보는 있었지만 이야기로 설명되지는 못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제조업의 AI 전략이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질문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가 아니었다. 데이터를 얼마나 잘 연결하고, 조직의 경험과 판단을 얼마나 구조화했는가가 더 중요했다.

AI는 흔히 ‘정답을 만들어주는 기술’처럼 이야기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경험한 AI의 본질은 조금 달랐다. AI는 없는 지혜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직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흩어져 있던 경험과 패턴, 그리고 암묵지를 빠르게 연결하고 증폭시키는 기술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보자.

한 제조기업의 생산기술팀에는 20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 엔지니어가 있었다. 그는 생산 라인을 한 번 둘러보기만 해도 어느 공정에서 병목이 발생할지, 어떤 부품에서 문제가 생길지 직감적으로 예측했다. 후배들은 그를 ‘걸어 다니는 공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가 퇴직을 준비하면서 조직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의 판단 기준이 시스템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던 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그는 데이터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는 설비의 미세한 진동과 생산 일정, 특정 협력사의 부품 편차, 특정 계절의 온도 변화, 그리고 작업자 숙련도 사이의 관계를 머릿속에서 연결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컨텍스트였다.

그리고 AI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 컨텍스트를 학습하고 증폭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여전히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ERP는 숫자를 저장했고, MES는 생산 실적을 저장했으며, PLM은 제품 정보를 저장했다. APS는 계획을 계산했고, BI는 결과를 시각화했다. 시스템은 많아졌지만 정작 시스템 사이의 판단 흐름은 연결되지 않았다.

그 결과, AI를 도입해도 조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AI는 데이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속에 숨겨진 맥락을 이해해야 비로소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최근 글로벌 제조기업들의 디지털 전환 전략을 보면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데이터 레이크(Data Lake)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 가능한 많은 데이터를 한곳에 모으는 것이 경쟁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선도 기업들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데이터를 모으는 것보다 데이터를 연결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품 개발 단계의 설계 의도와 생산 현장의 공정 데이터가 연결되기 시작했고, 품질 이슈와 공급망 리스크가 하나의 흐름으로 분석되기 시작했다. 고객 클레임 정보와 설계 변경 이력이 동시에 분석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의사결정의 흐름’을 디지털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Decision Context Base’라고 부르고 싶다.

앞으로 제조기업의 핵심 자산은 단순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조직의 판단 기준이 축적된 컨텍스트 베이스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 번 내가 수년 동안 연구하고 현장에서 활용해왔던 컨셉맵의 가치가 떠올랐다.

처음 컨셉맵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한 시각화 도구라고 생각했다. 복잡한 내용을 한 장으로 정리하는 그림 정도로 이해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수백 개의 컨셉맵을 만들면서 나는 조금 더 본질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조직은 정보를 몰라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조직은 흐름을 보지 못해서 멈췄다.

컨셉맵은 데이터를 예쁘게 정리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정보와 정보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고, 판단의 우선순위를 보여주며, 조직이 왜 이런 결정을 내리는지를 구조화하는 도구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은 AI 시대가 될수록 더 중요해졌다.

AI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조직의 맥락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면 AI는 더 빠르게 혼란을 확대할 뿐이었다. 반대로 조직의 컨텍스트가 구조화되어 있다면 AI는 놀라운 속도로 조직의 역량을 증폭시켰다.

이제 제조기업은 더 이상 “우리도 AI를 도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AI는 선택이 아니라 기본 인프라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제는 조금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조직의 판단 기준은 시스템에 남아 있는가?”

“우리 조직의 암묵지는 데이터로 연결되어 있는가?”

“우리 조직의 경험은 AI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구조화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기업만이 AI 시대의 진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AI 시대의 승자는 데이터를 가장 많이 가진 회사가 아니었다.

자신만의 컨텍스트를 가장 잘 구조화한 회사였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제조업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인재는 단순히 코드를 잘 작성하는 개발자가 아니라, 복잡한 조직의 흐름을 한 장으로 설명하고, 사람의 판단을 시스템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역할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고 싶었다.

Context Designer.

그리고 나는, 제조업의 미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된다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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