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Y.O.L.O

산사의 아침 - 해인사

PLM리스너 2013. 7. 30. 16:55
728x90
반응형

내 고향이기도 한 해인사... 얼마만에 다시 와 보는 건가... 아마도 몇해는 흘렀는 것 같다. 

더구나 혼자서 오는 것은 음... 30년쯤 된 것 같다. 

그땐 마음이 울적할때 자주 산에 오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했는데... 


잠시 휴가를 내서 아침 일찍 해인사를 들러 보았다. 

아침 7시 30분.... 

오늘은 내가 제일 처음 해인사를 방문했으리라 짐작된다.  

왜냐하면 경내로 올라가는 길에 아무도 없었고, 스님께서 절 경내를 빗자루로 쓸어 놓았는데, 아직 아무도 발도장을 찍어 놓지 않았다. 




주차를 하고 걸어나는 찰나, 처음으로 만난 다람쥐...

아래 돌 사이로 얼굴이 보일텐데... 사람과 대면이 익숙한가 보다. 몇장을 찍는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해인사는 언제나 계곡물이 마르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는 것도 행운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시골이라고 부모님 원망도 하고 그랬다. 시골이라... 


하지만, 수십년이 흐른 지금, 강산도 벌써 세번 바뀌었으니, 그동안 이런 시골스런 곳에 태어난 것을 이제는 자랑해도 괜찮다. 지금은 사람들이 "우와, 좋은 곳에서 태어나셨네요"... 


산보를 하는 도중 만난 표지판에 피톤치드에 대해서 설명해 놓았다. 

피톤치드(phytoncide) 는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가장 왕성히 생성된다고 한다. 

갑자기 피톤치드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겨 찾아 보았다.  


피톤치드는 1937년 러시아의 생화학자 토킨에 의하여 명명되었다. 식물이 병원균·해충·곰팡이에 저항하려고 내뿜거나 분비하는 물질로,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 이에 여러 상품들에 피톤치드의 효능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1937년 러시아 레닌그라드 대학(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생화학자인 토킨(Boris P. Tokin)이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희랍어로 '식물의'라는 뜻의 'phyton'과 '죽이다'라는 뜻의 'cide'가 합해서 생긴 말이다.

20세기 초까지 폐결핵을 치료하려면 숲속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며 요양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삼림욕을 하면 식물에서 나오는 각종 항균성 물질을 이르는 피톤치드가 몸속으로 들어가 나쁜 병원균과 해충, 곰팡이 등을 없애는 구실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이것은 일반적인 생각이며 피톤치드의 구성물질이 테르펜을 비롯한 페놀 화합물, 알칼로이드 성분, 글리코시드 등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 이에 여러 상품들에 피톤치드의 효능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방향제에 피톤치드 성분을 추출해 넣거나 음식물에 식물의 꽃이나 잎을 이용하기도 한다. 또한 식물의 고유한 피톤치드 향기는 식품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해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톤치드 [phytoncide] (두산백과)

길에서 만난 덩굴... 우리의 인생만큼 많이 꼬였다. 
순간적으로 나무는 이걸 어떻게 풀려고 할까... 
아니면 아무생각이 없겠지. 우리네 인간만 이런 것을 풀려고 하겠지... 


셀카를 찍었다. 그래도 갔다 왔다는 인증샷으로...


해인사 경내 관문... 



이곳 아름들이 나무는 서기 802년 이후 이곳에서 주욱 자리를 지키고 있으리라...  


해인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애장왕 3년인 802년에 지어진 사찰로 1000년이 넘은 고찰(古刹)이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며,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 중의 하나라고 한다. 해인(海印)이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으로, 득도한 이후의 청정한 마음을 일컫는다고 한다. 일주문에서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까지는 108계단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맞는다. 108개는 세상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불법인 팔만대장경을 보라는 의미라고 한다. 대적광전, 사명대사가 창건했다는 홍제암 등도 볼 수 있다.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외에 법보전과 대적광전에 쌍둥이 비로자나 불상이 있다. 국내 최고 목조불이라고 한다. 두 군데의 비로자나불상과도 모양, 크기가 쌍둥이처럼 닮아 세간에서는 두 불상을 만든 배경을 놓고 통일신라 말 진성여왕과 그의 삼촌이자 애인이었던 위홍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법보전 불상 안 명문에 기록된 불상을 만든 시점과 가까운 890년에 진성여왕이 해인사를 각간 벼슬을 하다 죽은 위홍의 추모 원당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두 불상을 봉안한 대비로전 뒷벽에는 둘의 사랑 이야기를 묘사한 벽화가 그려졌다고 한다.



저기 보이는 고사목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모습이 비슷하다. 죽어서도 그 자태를 유지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멋진 한폭의 사진... 


대적광전 ... 산사의 아침이 고요하다. 이런 모습을 볼때면 마음이 평온을 되찾는다. 



좀더 일찍이 안개낀 모습을 보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학사대... 최치원 선생께서 전나무 지팡이를 꺼꾸로 꽃아 놓았는데,  자라나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때문에, 가지가 꺼꾸로 자라는 것처럼 착시현상이 보이기도 한다.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천년의 지혜 ´팔만대장경´ 숨쉬는 해인사(데일리뉴스)의 기사를 참조하였다. 


고려 때 불경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의 정식 명칭은 고려대장경이다. 경판수가 8만1258개에 달해서 팔만대장경이라 부른다. 1251년에 완성한 현존 목판대장경 중 최고(最古)다. 목판 8만1258개, 5200만자, 경전 1514종, 6800권으로 이뤄져있으며 수다라장과 법보전에 보관돼 있다. 부처의 가르침인 경(經)·율(律)·논(論)의 3장(三藏)을 집대성했다.

내용이 정확해 각국에 전파돼 불교연구와 확산을 도왔으며 세계 인쇄술과 출판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료를 보면 이규보(1168~1241)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판각 동기가 나와 있다고 한다.

당시 고려는 초조대장경의 판각을 통해 불심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려 했다. 이것이 고려에서 처음 만들어진 대장경으로 송나라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판각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소실됐고, 다시 대장경 판각을 완성(1251)한 것이 지금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세계 최대의 목판본으로 국보 제 32호이며 동시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역시 국보 52호이면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이 한 공간에서 지정된 것은 경남 합천 해인사가 세계에서 유일하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해놓은 장경판전은 해인사 스님조차 드나들기가 어렵다고 한다. 

누구든 장경판전에 들어가려면 종무회의에서 스님 10명의 만장일치로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경판전은 조선 초인 15세기에 지어졌다. 오랜 세월 동안 대장경판이 습기와 벌레등의 손상 없이 경판을 보존해온 핵심은 바람, 즉 통풍이라고 한다. 장경판전 벽면의 아래 위, 건물의 앞면과 뒷면에 있는 창의 크기가 엇갈리게 다르다. 내부로 들어온 공기가 맞은편으로 바로 빠져나가지 않고 아래, 위를 골고루 돌면서 적정한 습도를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또 바닥을 깊이 파서 소금, 숯, 찰흙, 모래, 횟가루를 층층이 쌓아 다져 습도가 높으면 바닥이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는 바닥이 습기를 내뿜어 자연적으로 조절이 되도록 한 것이다. 

또한 경판 표면의 온·습도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굴뚝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굵은 각재를 이용해 설치한 판가는 경판을 두 단씩 세워 놓도록 단을 둬 공기유통이 잘 되도록 했다. 5단으로 된 판가 각 단에 조밀하게 배열된 경판과 경판의 틈새가 일종의 굴뚝효과를 내고 있다. 더운 날 판전 앞 창에 앉아 있으니 시원한 바람이 목 줄기를 타고 느껴진다. ‘아 이것이 바로 목판 보관에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증거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1972년 해인사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경판을 보관할 건물을 새로 짓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테스트를 위해 새 건물로 옮겨 놓은 일부 경판에서 습기 조절이 되지 않아 뒤틀림과 결로현상이 생겨 그 건물은 지금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발길이 닿는 곳으로 간 곳은 백련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3천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로 떠오르는 성철스님이 입적하신 곳이고, 머물렀던 곳이다. 

백련암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605년 선조 38년에 서산대사의 제자 소암이 중창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89년 벌써 24년이 흘렀구나. 그땐 백련암에서 열공중인 스님을 찾으러 백련암까지 왔었는데... 그 당시 차를 가지고 있던 후배 덕분에 산세도 구경하고 임무도 완수하고 말이다. 

그땐 스님께서 내어주신 바나나와 다른 과일도 맛볼 수 있었고, 좋은 말씀도 전해 들었다.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 

자 이제 추억속의 백련암으로 올라가 본다. 





사진보다 눈으로 봤을때가 더 아름다웠다. 카메라의 한계로 아쉬움이 남는다...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날씨가 좀 더 흐렸으면 더 멋있을 텐데... 



백련암 입구... 



담벼락을 포위한 이 담쟁이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 



불면암.. 부처님 얼굴바위로 알려져 있다. 


내려오는 길에 이 나무가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 

올라갈땐 보지 못한 나무의 뒷면을 보는 순간, 이 나무가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려는지 깨달았다. 

겉과 속이 다른 삶...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 틈새로 보이는 세상에 대해서 또다른 나를 발견한다. 


- 힐링 100% -

728x90
반응형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